7.8일 오전 국힘당 중앙 윤리위원회에서 당대표 이준석이 성 상납받은 혐의로 6개월 당권 정지당했다. 이준석 자신은 정작 성 상납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당 재선 의원은 “이번 징계로 이준석 대표의 말은 힘을 잃게 됐다. 이 대표가 징계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 상황”이라고 했고, 징계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 조해진 의원도 <와이티엔(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징계 수위는 대표 그만두라는 수준”이라며 “이대표가 본인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단다.(한겨레, 2022.7.9.)
민주당 윤리위원회에서도 ‘짤짤이’인지 ‘딸딸이’인지를 두고 최강욱 의원에게 6개월 당권 정지 처분했다. 그러나 최강욱 본인은 ‘짤짤이(놀이 일종)’라고 했을 뿐, 성희롱 뜻를 담은 ‘딸딸이’ 발언은 한 적이 없다고 하고, 또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보좌관 중에는 그 같은 발언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 이도 있다고 한다.
성 범죄자 잡아내는 것이 국회의 본업인 것처럼 여야를 가리지 않고 야단이 났다. 여야가 다 한 물에 놀고 있다. 차제에 국힘당은 개혁의 기치를 계속해서 드높여갈 것이라고 한층 더 결기까지 다지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에서도 전 비대위원장을 지낸 박지현에 따르면, 최강욱 ‘짤짤이’ 발언 여부에 대한 ‘엄중한’ 문책이 민주당 쇄신의 이정표에 한 획을 긋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야 막론하고 이른바 윤리위원회라는 곳이 절차상 하자를 범하고 있다. 많이 양보하여 이준석이 성 상납받은 사실이 있고, 최강욱이 실제로 ‘딸딸이’ 발언한 것이 나중에 사실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러하다. 첫째,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속단하여 조기 졸속 처벌한 것이 그러하다, 둘째, 그 과정에서 국회가 존립하는 원래의 본분, 입법의 영역이 아닌 사법의 영역을 부당하게 침범했기 때문이다.
여야 윤리위원회라는 것이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혐의의 사실여부보다 때맞춰 처벌하는 것, 그 처벌을 통해 권력 빼앗기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의원 조해진이 “이대표가 본인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관계자, 친윤계)’ 국힘당 원내대표 권성동이 ‘즉시 직무대행’ 체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고, 이준석은 ‘사퇴하지 않는다’고 대립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목하 정부에서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한다고 하여 경찰청장이 사퇴하고 검찰이 여기저기 반발하여 궐기하고, ‘검찰공화국’ 도래의 위험 앞에 민초의 걱정이 장난이 아닌 마당에, 여야 막론하고 국회는 엉뚱하게도 자체 내 성 범죄 혐의자 징벌하는 데서 할 일을 찾았고, 쇄신의 결기까지 다지고 있다. 민초의 염려와 따로 놀고 있는 국회는 온통으로 하릴없다. 물증도 없이 최강욱을 성희롱으로 몰아 ‘엄벌’한 민주당 윤리위원회가 최강욱이 제시한 ‘의원 선출 3선으로 제한’, ‘검찰정상화’ 등 뜨거운 감자 앞에서는 오히려 몸을 움츠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범죄 자체가 윤리적, 법적으로 매도되고 처벌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고, 어떤 행위이든 범죄로 처벌한다는 사실 자체는 권력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권력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억압되고 경직된 사회가 된다. ‘법치’의 주체는 정부 권력, 관료이다.
경직된 ‘법치’의 반대편에 ‘민치(民治)’가 존재한다. 민치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상식이 지배하는 것이다. ’법치’와 ‘상식’의 지배의 비중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 구조이다. 관료보다 민중의 결정권이 강할수록 제정법(실정법)보다 상식의 비중이 증가한다.
집중된 정부 권력 같은 것 없이, 민회가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범죄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어떤 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없었다. 성범죄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야하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그랬다. 이른바 우리가 특별하게 성범죄로 부르는 것을 포함한 온갖 사안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인(개인) 간 권리의 쟁송을 통해 해결되었고, 동성애자도 사회적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전적 민주의 전형 고대 그리스에서 민초는 경직된 '법치'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 행위가 누리는 자유의 영역은 넓었다. 공동체에 해를 끼쳤는가의 여부는 다수 민중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진술과 증거를 토대로 마침내 가려졌다. 물증도 없이 소수 위원회에서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흔히 ‘법치’를 ‘정의’ 혹은 ‘민주적’인 것으로서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법치’는 말 그대로 ‘법치’일 뿐, ‘정의’나 ‘민주’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民主)는 ‘법치’의 반대 개념이 되기도 한다. 그 제정된 ‘법’으로서의 실정법이 민초의 뜻을 배반할 때, 비민주적일 때 그러하다. 그 한 예가 35년이 넘도록 개정되지 않은 현행 1987년 헌법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여전히 낡은 것으로 남아있는 현행 헌법은 민초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맞지 않는 법을 법이라고 들이대면서 지키라고 하는 것이 무리다.
문제는 간간이 새어 나오는 개헌의 담론조차 민초의 뜻을 배반하고 비민주적인 방향으로 돌리려 하는 시도가 있다는 점이다. 국민개헌발언권, 국민소환권, (사람을 뽑은 선거권에 한정된 것 아니라 안건에 대해서도 결정권 행사하는) 국민투표권 등을 탈취해간 유신 독재헌법의 잔재를 일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의원내각제 개헌을 획책하는 움직임이 그러하다. 이것은 벙어리같이 막힌 민초의 입을 더욱더 확실하게 막아버리려고 비민주적 ‘법치’의 개헌을 지향하는 것이다.
‘법치’를 ‘법에 의한 지배’와 ‘법을 통한(이용한) 지배’로 구분한다. 전자가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법의 원래 취지가 그대로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법을 빌미로 내세우고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같은 구분은 ‘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 같은 것이다. ‘법치’ 자체가 집중된 권력이 없으면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야 국회가 ‘법’의 이름으로 다소간 성범죄 혐의자를 각각 6개월 당권정지 처분한 것은 관료주의 권력 오용의 극치를 연출한다. 첫째, 사법 절차의 판단을 거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본인이 부인하는 사안에 대해서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둘째, 입법부인 국회가 본업을 망각하고 사법의 영역을 침범했으며, 셋째, 개혁 쇄신의 방향을 성범죄 척결이라는 도덕성으로 틀면서, 발등에 불 떨어진 행정부 독주에 대한 견제에는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 최자영 편집인/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그리스 이와니나대 역사고고학박사/의학박사/전 서양역사문화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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