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영의 금요칼럼]한동훈의 휴대폰 비번을 숨기는 것과 유동규의 핸드폰 버리기는 무슨 차이인가?사태를 왜곡해 민초를 혼미하게 만드는 조·중·동 언론이낙연이 말하는 실체없는 ‘도덕성’진중권의 궤변 "이재명은 무능하지 않으면 부패한 것'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후보 이낙연이 대장동 문제를 거론하면서, 경선 관련하여 ‘더불어민주당 내’의 도덕성을 거론했다. 대장동을 둘러싸고 줄줄이 엮여나오는 국힘당 인사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그의 관심은 같은 당 같은 대선후보인 이재명에게 가 있다는 반증이다. 대장동 자체가 어떻게 비리와 불로소득의 온상이 되었나가 아니라, 이재명이 거기에 어떻게 엮여있나 하는 것이 이낙연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이낙연이 말하는 ‘도덕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실체가 없다. 언뜻, 판단기준이 모호하고, 또 털어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것이라는 점을 들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대장동 개발 설계에 이재명이 어떤 식으로든, 다소간에 관여하여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이낙연도 그에 유사한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소문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에 따르면, 전남개발공사를 믿고 250명 가량이 여수시 대경도 해양관광단지 사업에 퇴직금 등을 투자했다가 200역원 이상을 날렸다고 한다(뉴스원, 2017.5.24.) 이 사업은 이낙연이 전남도지사로 있을 때 전남개발공사가 시작했다가, 2017년 YK개발(YKD)에 사업권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YK개발은 미래에셋컨설팅 자회사라고 라고, 미래에셋은 그 총수 일가 지분이 90%가 넘는다고 하고, 미래에셋 총수 박회장은 이낙연 전 전남도지사와 고교 선후배 사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이 같은 미흡한 인간성에 관련한 원론적 차원의 양비론(이도 저도 아니라는)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더 근원적으로 ‘도덕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도덕성에 빗대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뭐 그런 것을 뽑는다고 생각할 때, 그 헛된 희망과 믿음 자체가 우리를 권력의 사슬에 얽어매는 모든 질곡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비리를 한 사람만을 상징적으로 매도함으로써 분노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는 데 있다. 우리의 곪은 상처는 세균이 버글버글하듯, 여럿이 더불어서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 그것을 만들 수도 없고, 또 어떤 희대의 영웅호걸이 나와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구 한 사람을 목표로 하여 매도하거나, 또 그 매도 당하는 이 대신에 자기가 나오면 그 곪은 데를 다 없애겠노라고 큰소리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고 하릴없다.
진중권이 이재명을 두고 무능하지 않으면 부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매일신문, 2021.9.30.) 대장동 이권에 다소간 연루된 것으로 줄줄이 보도되는 국힘당 어른들이 진중권의 눈에는 아예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태양같이 오직 이재명이 비리의 원천으로 보일 뿐인 것 같다. 이재명이 유능하거나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대장동 사태는 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분명하다. 진중권의 눈에 이재명 빼고 다른 이는 무능하거나 부패한 이가 없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궤변을 떠나서 진중권이 가진 가장 큰 환상은 모든 사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재명 때문에 안 되고, 윤석열만 있으면 다 정상이 될 것같이 보는 ‘영웅주의’. 도덕성의 믿음에 관련한 두번째 오류로서 잘되나 못되나 모든 사태의 원인을 개인의 소치로 보는 ‘영웅주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 깃든 허망한 환상에 있다. 도덕성이 있는 이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하겠다는 우리의 결연한 각오가 우리 사회 자체에 존재하는 제도적 허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출된 정치가나 공직자가 도덕적이기를 바래는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 이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감시와 단죄의 칼을 들고 있지 않는 한 그 믿음은 메아리 없는 일방통행의 기대에 불과하다. 만일 공직자의 비리를 단죄할 수 있는 감시 처벌의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더라면, 도덕성 담론이 이렇듯 절실하게 호소력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잘못하면 벌을 주고 혼을 내고 내쫓고, 다른 이로 교체하면 될 것 아닌가? 지금은 그것이 안 된다.
대통령과 대법원이 죽을 맞춰서 사법권력을 농단해도, 다시 촛불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한 대책이 없다. 또 검찰과 법관이 삼척동자로 보면 뻔히 아는 그런 것을 외면하고 오히려 죄 없는 이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속수무책 민초는 하릴없이 당하고만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도덕성’이 있는 이를 공직자로 뽑아 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 대신 누구라도 공직을 이용하여 사리를 도모하는 이는 엄하게 처벌하여 일벌백계해야 하겠다고 두 눈을 부릅뜨는 것이 좋겠다. 사람이 권력 맛을 들이면 돌변하는 수도 적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털어 먼지가 적게 난다고 방심할 것도 아니다. 다소간 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가 되는 이를 잠재적 독재자, 범죄자로 보는 것이 민초를 스스로 보호하는 길이 된다. ‘도덕성’ 있는 이를 대통령으로 뽑자고 소리 높이는 것은 지금까지 줄곧 속아만 왔던 민초의 헛된 환상을 부채질할 뿐, 공직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호도하고 회피하려는 흉계이다. 도덕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는 아마도 민초를 배반하려고 흉계를 품은 것이다.
도덕성을 앞세워 개인을 매도하고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민초를 혼미하게 만드는데, 조·중·동 언론이 앞장서고 있다. 조선일보가 국힘당 하태경 의원의 페이스북 글을 따와서, 5년 전 이재명의 휴대폰 발언을 전면에 부각하고 나섰다. 지난 2016년 한 강연에서 이재명이 ‘사고 치면 핸드폰 뺏기지 말라. 인생기록 싹 들어있다’고 한 말을 들면서, 이른바 이재명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유동규씨에게 핸드폰 버리라고 지시했나?”로 확대 연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발언은 범죄 혐의자의 수사에 관련한 것이 아니었다. ‘사고 치면 핸드폰 뺏기지 말라. 인생기록 싹 들어있다’는 것은 반드시 사고와 관련한 정황을 은폐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사고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인생기록의 정보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공개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또 그 ‘사고(事故)’라고 할 때 그 사고도 여러 가지 범주가 있고, 그것이 반드시 범죄 혐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고와 범죄는 동일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사고’를 말한 이재명을 검찰 수사를 받는 유동규와 바로 연결을 지우는 논리의 비약을 범했다. 그러나 거짓 증언 사주를 두고 채널A 기자와 연루되어 범죄혐의가 있는 검사장 한동훈이 지금도 자신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까지 않아서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선일보는 거의 함구 수준이다. 해서는 안 되는 수작을 한 혐의의 공직자가, 범죄사실의 수사에 비협조적인 데 대해서 조선일보가 반성을 촉구한 적은, 과문한 필자가 알기로, 없는 것 같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열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