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한동훈에 안 어울리는 투키디데스, 투키디데스는 군국주의가 아니라 반전(反戰)의 평화주의자였다(유튜브)정의연대 최자영 교수와 김상민 사무총장의 시사토크-친일 매국의 끝판왕 윤석열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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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로 이삼일 전 한동훈(법무장관)이 유럽 출장길에 빨간색 책을 손에 들었는데, 연합뉴스 발(發), 한겨레 신문에 의하면, 이 책은 2천500여 년 전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고 한다.(연합뉴스, 한겨레, 2023.3.9.)
김종대(전 국회의원, 현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는 “지난 7일 출국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들고 있던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는 미국과 중국이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하는 데 딱 들어맞는 책”, “이 책으로부터 유래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은유는 패권국과 이에 도전하는 신흥강대국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벌어진다는 점을 설득한다”, “책 결말에서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등의 의견을 개진했다.(2023.3.9.)
이 같은 김종대의 투키디데스 이해는 틀렸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는 미국과 중국이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하는 데 딱 들어맞는 책”도 아니고, 또 “책 결말에서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투키디데스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 혹은 오해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투키디데스 함정’, 다른 하나는 그를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투키디데스의 이해는 불완전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反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 사상을 거꾸로 이해하는 것은 흔히 예수의 희생이 후대에는 착취로, 또 그 사랑이 차별로 둔갑하는 것과 같다. 원래 뜻이 반대로 해석되어 아전인수 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
이른바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란 미국 하버드대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80) 등이 제시한 개념으로, 간단히 말하면,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주장된 것으로, 투키디데스는 기존 맹주 스파르타가 신흥 강국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이에 두 국가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이런 인간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통해 전쟁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쟁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방대한 그의 <역사>를 기록했다. 투키디데스의 역사에 보이는 반전의 지향성은 크게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우연, 둘째, 무력증강과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전(反戰)주의, 셋째, 방어전쟁에서는 용기와 지혜로서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 등이다.
첫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우연(tyche 티케)은 침략적 행위의 효과를 장기적으로 무효화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침략행위의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거의 반반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볼 때 침략행위는 아무런 이득을 우리에게 가져오지 않는다.
둘째, 무력증강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관련하여 투키디데스는 그 궁극적 해결책을 인간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에서 찾는다. 인간의 본성은 개조가 불가능하며, 평화와 전쟁의 동기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제도로서 전쟁보다 평화의 계기를 조장할 필요가 있고, 전쟁에 대한 경계는 무력과 군국주의를 경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평화와 번영이 깃들 때는 나라나 개인이나, 부득이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므로, 더 나은 양식을 가지지만, 전쟁은 일상의 편안함을 점차 없애는 폭력의 교사이며 대중의 기질을 그에 맞도록 변화시킨다.
셋째, 용기와 지혜는 외적을 막아낼 때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방어에 수반되는 것이다. 이때 상대의 힘의 우세 여부와 무관하게 무조건 저항해야 하므로 상대의 ‘힘’에 대응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가 필요하며, ‘우연(티케)’의 추(錘)와 무관하게 필사적 ‘지혜(그노메)’가 필요하다. 투키디데스는 한편으로 외적에 대한 방어전쟁을 높이 기렸고, 다른 한편으로 침략적 군국주의, 제국주의, 무력증강을 경계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인간지사는 반복되므로 자신의 역사 기록이 교훈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또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으므로 많은 가공할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투키디데스는 후대를 위해 교훈의 역사를 썼다. 그 교훈은 군국주의를 경계하고, 군비증강, 무력 균형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무력 조직 및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반전(反戰)의 평화주의에 있다.[참조, 최자영, “전쟁의 원인과 국제관계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분석 - 긍정적 인간성과 평화의 지향에서 보이는 현대적 의미”, 대구사학 101 (2010.11), pp.1~26.]
한편, 김종대는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미국과 중국 사이에 파국적인 충돌이 있을 것으로 믿는 것 같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있을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본부장(본인, 부인, 장모)’ 비리 등 국내적으로 당면한 질곡을 피하기 위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고, 그래서 대외 주전(主戰)의 강경책을 주창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수법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동시에 국내의 따가운 눈총을 돌파하기 위해 외세에 편승하려는 시도도 현저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외세에 편승하기 때문에 따가운 눈총이 더 가중되는 수도 있겠으나, 이나 저나 윤석열로 보아서는 국민 민초의 정서를 도외시하고 ‘제멋대로(마이 웨이)’ 독자적 행보를 연출하고, 한 나라를 자기중심적으로 끌고 가고 있다. 미국, 일본 등의 외세에 편승하는 것은 곧 군국주의를 뜻하며, 그것은 민주 아닌 독재를 뜻한다.
윤석열의 이 같은 행보는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 정치제도의 공백을 노정한다. 말로만 민주주의라고 떠들어왔으나, 1987년 헌법은 여전히 언제라도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유신독재의 유산이라는 것이 윤석열을 통해 명백히 증명되었다.
한동훈은 영어로 쓰인 빨간 표지 책을 옆구리에 끼고, 투키디데스라고 적인 부분을 유난히 잘 보이도록 표지 반 정도를 노출시키면서 보란 듯이 기자들 앞에서 시위를 했다. 윤석열과 한 ‘세트(쌍)’로 놀고 있는 한동훈이 고대 그리스의 고명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소환하는 목적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한·미’ 공조는 물론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은연중에 부추기는 윤석열을 정당화하려는 속내를 내보인 것이다. 고명한 역사적 인물을 거론하여 자기 이론 혹은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극장의 우상’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투키디데스가 그(그들)가 지향하는 바의 군국주의자가 아니라, 정반대로 반전(反戰)의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이다.
투키디데스가 갖는 극장의 우상 효과는 한동훈의 기대에서 한참 빗나갔다. 비행기 타러 가는 출국장에서 투키디데스를 옆구리에 끼고 나갔으니,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 비행기 안에서 보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책의 취지를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미 읽었는데 날로 읽어서 그 대의를 잘 못 파악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한동훈이 비행기 안에서 투키디데스를 정독하지 않았을 확률은 십중팔구보다 더 높고, 그래서 여전히 투키디데스가 반전 평화주의자라는 사실, 특히 군비확장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 같다.
투키디데스가 제국주의자, 군국주의자로 이해되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안에 아테네 해상제국이 추구한 강자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테네가 멜로스 섬(키클라데스 제도)을 쳐들어갔을 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개진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상을 있었던 대로 고발한 것이지 그가 후대에 남기려 한 교훈이 아니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투키디데스, 5권 85~113]
“세상의 이치에 따르면 정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양자의 세력이 대등할 때 논할 수 있는 것이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고, 약자는 굴복하는 것이지요.”(5.89.) “우리가 지배자의 지위에서 물러선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우리가 힘이 없어질 때면 힘 있는 자에게 복종할 태세가 되어있기 때문이오.”(5.91.1.) “[당장에 항복하는 것이 쌍방에 다 유리하다는 논리로서]여러분은 최악의 상황에 빠지지 않고 종속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며, 우리는 여러분을 살육하지 않고 살려 둠으로써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오.”(5.93.) “여러분의 증오를 사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소. 오히려 여러분의 호의를 사는 것이 우리의 약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종속국들이 생각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이오. 증오를 받는 것은 강력한 지배자의 증거가 되는 것이오.”(5.95) “신에게서나 인간에게서나 강자는 약자를 지배하는 법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오. 이런 법칙은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우리가 처음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예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도 우리가 처음인 것도 아니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것을 계승하여,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오.”(5.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