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정치개혁자문위가 비례대표 50인 증원을 전제하는 권고안을 냈더니, 대구시장 홍준표, 국힘당 대표 김기현, 원내대표 주호영 등이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자 전 서울시 교육감 곽노현이 의원정수를 늘려서 비례대표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곽노현에 따르면, 홍준표 등이 반대하는 것은 의원정수 증원뿐 아니라 그 배후에 숨은 비례대표제라고 한다. 곽노현은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정해지는 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지역구의석을 줄이지 않고 비례대표제를 강화하려면 의원정수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시민언론 민들레, 2023.3.23.)
여론조사에서 의원정수 증원에 반대하는 비율이 80% 안팎으로 일관성 있게 압도적이다. 국힘당이 왜 결사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옹호하는가에 대한 이유로서 곽노현은 지난 70년 동안 60년도 넘게 소선거구제 아래서 국힘당 계열이 제1당의 지위를 누려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래서 곽노현은 김기현(국힘당대표)과 주호영(국힘당 원내대표)에게 소선거구제의 불비례성 때문에 국힘당이 더할 나위 없이 된통 당했던 2018년 광역의회 선거결과와 2020년 총선 결과를 상기시켜주고 싶다고 한다.
2018년 수도권 광역의회 선거에서 국힘당은 서울, 경기, 인천에서 모두 10% 미만의 의석을 얻어서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민주당은 90% 이상을 싹쓸이하며 문자 그대로 일당독재를 했다. 세 군데 모두에서 정당득표율은 5% 차이도 나지 않았다. 2020년 총선에서도 국힘당은 수도권에서 궤멸 수준의 참패를 겪었다. 서울, 경기, 인천에서 각각 국회의석수의 15% 안팎을 간신히 건지고 85% 안팎 국회의석을 민주당에 몰아줬다. 수도권 명목상의 정당득표율 차이는 오히려 국힘당이 0.4% 앞섰는데도 그랬다는 것이다.
곽노현에 따르면, 종합적 선거결과는 51% 지지율 정당이 49% 지지율 정당을 모든 지역구에서 이겨서, 소선거구제의 불비례성이 현실화한 선거참사이다. 그래서 곽노현은 당 차원의 유불리 계산에만 갇혀서 소선거구제에 집착하지 말고, 다소간 비례대표제를 수용하라고 국힘당에 권고하고, 비례대표제를 하기 위해 의원정수를 증원하자는 입장이다.
이런 곽노현의 입장은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선거제도에서 국힘당의 전략적 계산만을 경계할 뿐,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심 80%가 의원정수 늘리는 데 반대한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곽노현은 국힘당만 마음을 돌리면 민심의 향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50명 정도 의원정수를 늘려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민초의 뜻이 우선해야 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당 중심의 과두정치적 사고방식이다.
곽노현의 견해는 정당이 민초 위에 군림하는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민초 80%가 반대하는 것도 국힘당만 설득하면 의원수를 늘려도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민초의 뜻은 위정자 간 이해의 향방에 의해 압도, 묵살되어왔고, 이런 비민주적 전통은 정당 관련인뿐 아니라, 일반 민초의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어 그 척결의 전망이 요원하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이른바 진보 성향의 인사로서, 회자하는바, 수구 정권 하에서 불이익을 당하여 임기를 다하지 못한 희생양이 아닌가 하는 인물이다. 그런 이의 사고에서조차 민심의 향배는 정당의 이해관계 앞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둘째, 곽노현에 따르면, “지역구의석을 줄이지 않고 비례대표제를 강화하려면” 의원정수 50명 정도를 늘려야 한다. 왜 곽노현은 “지역구의석을 줄이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현재 기득의 국회의원이 자기가 붙들고 있는 지역구를 뺏기지 않으려 한다는 현실적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의원들의 이기적 욕심이 민심의 향배를 배반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재로서 한국은 민초가 객(客)이고 정당이 주인이다.
비례대표제가 좋다고 생각되면 실시하면 되는 것이고, 또 의원정수 늘리는 데 80% 만심이 반대한다면 늘리지 말아야 한다. 다만, ‘지역구의석을 줄이지 않고’, 또 민심 80%가 반대하는 의원정수를 늘리면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것은 의원들의 욕심을 앞세우고 민심을 내팽개치는 것이다.
국회는 같은 의원이 같은 지역구에서 2선, 3선 등 자꾸만 재선되라고 있는 놀이터가 아니다. 소선거구제를 한다고 비례대표제 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 소선거구제에서도 정당에 투표하고, 병립형, 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같은 것을 병행하되, 그 비율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소선거구제 비율을 줄이면 된다. 그러면 민심이 반대하는 의원수도 늘릴 필요가 없다.
한편, 곽노현은 다시 홍준표에 대한 반론 관련하여, 미국 50개 주 상하원 총7386명(상원 1973명, 하원 5413명)에 연방 상하원의원 535명을 보태면 7921명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7921명이 하는 일을 한국 국회 300인이 하는 셈이니, 인구비례로 치면 총 1288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곽노현은,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터무니없이 적으므로, 비례대표를 30명이나 50명 늘린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다만 향후 4년 동안 국회의원 관련 예산을 현 상태에서 동결하는 조건을 달자고 한다.
이 같은 곽노현의 제안은 국회의원 수 증감 문제를 차치하고, 획일적 중앙권력 비대화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문제는 미국의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상하원 총수와 한국 중앙 국회 의원수를 산술적으로 비교하는 점에 있다.
곽노현 자신이 지적했듯이, 미국의 50개 주는 하나하나가 state(국가)라고 봐야 하며, 형벌이나 조세를 부과하는 법률제정권은 연방이 아니라 주정부에 있다. 반면, 연방은 보충성의 원칙(주정부를 보충함)에 따라 원칙적으로 외교안보와 주(州)정부 간 통상(通商)에 국한되며, 입법권은 그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의 주정부와 연방정부 간의 이 같은 기능의 차이는 중앙집권적인 한국의 중앙과 지방 간 관계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국의 지방정부 및 의회는 미국 주정부가 갖는 형벌, 조세 부과 등 법률제정권 등 주요 입법권을 갖지 못하고, 중앙정부에 부속된 아바타, 장식품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중앙, 지방 간 권력의 불균형에 더하여. 곽노현은 미국 주정부, 연방정부 상하원 총수를 한국 국회 의원수와 단순 비교하고, 한국 국회의원 수를 늘려도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자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같이 지방정부 및 의회의 관할을 강화해서 중앙과 같거나 중앙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높여야 하겠다. 그래야 지금 같은 질곡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대통령에다 ‘권력에 눈독들이는’ 국회, 이런 부정적 효과는 중앙집권의 필연적 산물이며, 권력의 단위를 분산할수록 그 같은 위험은 반감한다.
할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있는 견제 기능도 구체화하지 못하는 국회에 의원수를 더 늘린다는 것이 원론적으로 무의미하다. 의원수 늘리는 데 압도적으로 반대하는 민심은 그 같이 직무는 유기하고 욕심은 다락 같은 국회에 대한 실망을 반영한다.
현재로서 국회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 그러니 국회의원수를 늘리자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회를 감시할 수 있는 국민투표제도를 두어야 하겠다. 국회가 행정부 견제의 임무를 게을리할 때는, 궁극적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최종 결정권자로서 직접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곽노현은 “향후 4년 동안 국회의원 관련 예산을 현 상태에서 동결하는 조건”으로 의원수를 늘리자고 했으나, 이것도 자의적이다. 그런 조건이 지켜지도록 감시할 제도적 장치가 없고, 또 4년 뒤에는 국회가 멋대로 자기네 예산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 관련 예산을 의원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다는 것은 제도적 공백이다. 한국 국회의원이 받는 보수와 특권이 세계 제일간다는 말이 회자하는 것도 이 같은 환경에서 가능하다. 국회가 ‘제멋대로(셀프)’ 자기네 예산 및 보수를 결정하는 것은, 윤석열 행정부가 고삐 풀린 말같이 ‘제멋대로’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맹점들은 현행 1987년 헌법이 남긴 독재의 잔재이다. 오늘의 질곡은 그 태풍의 눈에 윤석열이 있으나, 그이는 1987년 헌법 및 검찰조직의 부산물이며, 나아가 민초 자신의 거울이다, 민초가 지금까지 그런 검찰의 관행을 양해, 묵인해왔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이라는 발언을 일본에 가서 했다고 한다. 윤석열이 보기에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아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재의 화신이다.
외교 참사는 국회의 묵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대통령 혼자 뜻으로 외교참사를 벌일 수 있는 것은 당연 민주국가가 아니다. 대통령의 작위는 촛불의 아우성뿐 아니라 당연히 국회에서 견제해야 한다. 4, 5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윤석열의 독재는 독선 여부뿐 아니라, 그 같은 독선의 공간을 허용하고 있는 1897년 헌법의 문제이다.
1987년 헌법이 민주 아닌 유신독재 잔재라는 점을 윤석열이 증명하고 있다. 그 독선에 대한 당장의 견제 장치가 미비하다면 그러하다. 국회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획책할 것이 아니라, 삼권분립에 입각하여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탄핵 등의 제도를 시행하고, 미비한 부분을 보완 강화하는 입법에 착수해야 한다.
이 난장판에도 촛불 뒤에 숨어서 과반수 민주당은 “초당적 정치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선거제도 운운하며, 1년이나 남은 임기의 효과를 뭉개고 있다. 정당에서 공천받는 의원들은 독립헌법기관이 아니라 정당의 눈치만 보느라, 국회를 무지렁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민주당대표 이재명이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해 입법 발안했다고 한다. 그 자체로서 나쁘달 것이 없겠으나, 그런 간접적 방법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제멋대로 외교를 금하고 국회의 추인을 거치도록 대통령에 대한 제재에 들어가야 하겠다.
국회는 대통령의 행위가 국익에 반한다고 생각될 때는 즉각 정직처분해야 하고, 그 절차가 미비할 때는 바로 입법에 들어가야 한다. 현재로서 국회법 제98조2[③ 대통령령 등의 법률 위반 여부 등을 검토하여야 한다]에서 행정부의 시행령 정치에 대해 견제할 권한과 의무가 있으나 “검찰 수사권 시행령 정치”에 대해 국회는 손을 놓고 있다.
문제는 국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참사와 한미일 신냉전 획책을 규탄하는 교수·연구자 단체 및 국회의원 공동성명서>가 나왔는데, “신(新)시일야방성대곡, 윤석열 정부의 외교참사를 역사의 이름으로 규탄한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것은 조선조 말기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올린 글,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황성신문, 1905.11.20.)에서 따온 것이다.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한국이 여전히 민주 아닌 봉건국가임을 증명한다. 지금은 군주의 봉건체제가 아니라 민주국가이므로, 삼권이 서로 견제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냥 “방성대곡(목놓아 울기)”만 하고, 그러지 말라고 읍소만 하는 것은 민초 자신이 스스로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민초도 국회와 같이 무지랭이 못난이들이 된다. 그 민초의 수준에 맞는 그런 국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회는 다시 민초 위에 군림하고 있다.
▲ 최자영 편집인/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그리스 이와니나대 역사고고학박사/의학박사/전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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